Thrasymachos와 Sokrates의 대화(1)
«국가», 336b-338b.
소크라테스가 밝혀낸,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의 의미규정의 원천은 ‘부유한 참주’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부, 경제와 정치권력을 결합하여 지배력을 만들어낸다. 폴레마르코스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이로운 것을 고려하는 민주적 원칙을 가지고 있으나 이 체제는 금권과 결합하면 쉽사리 훼손된다. 민주정에서 경제적인 위력이 정치적인 권력으로 전이되는 것은 통제하기 어려운 일이며, 그러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것 역시 아테나이 민주정 이후 계속되고 있는 난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와의 대화에서도 ‘재산획득기술’(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6a 참조)을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가 대화를 중단한 틈을 타서 “여러 차례 논의에 끼여 들려고” 했던 트라시마코스가 마침내 “야수처럼”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트라시마코스가 “소리를 지르며”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가 “허튼 소리에 매달려” 있다고 질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왜 야수처럼 덤벼들었을까? 대화 상대자의 등장과 퇴장에 관하여 플라톤의 대화편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질책으로 시작한 것에 걸맞게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비난한다. 그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알고자 하신다면, 묻기만 하시지도” 말고 “주장하시는 바를 분명히 그리고 정확히 해”(I want a clear and precise statement)달라고 압박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는 대화 상대자의 등장과 퇴장 방식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첫 머리에서도 대화를 마지못해 시작하였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경우에 흔쾌하게 대화를 시작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시치미 떼기 술법”(eirōneia)이라 규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이와 대화할 때 그의 주장을 들은 뒤 되풀이하여 질문을 해서 그것이 과연 참인지를 확인하려 한다. 이는 ‘논박’(elenchos, ἔλεγχος)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화 상대자에게 ‘무지의 자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지적인 ‘공동탐구’(syzētēsis)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어떤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가진 진리의 계기를 유보하면서 허위의 계기를 부정하는 규정적 부정이며, 대화가 계속됨에 따라 부정적 계기는 소거되고 적극적 긍정적 귀결에 이르게 되는데, 이 귀결은 대화의 출발점보다 상위의 입장에 올라선 것이다. 트라시마코스가 이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주장을 펼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타인의 주장이 제출되지 않는다면 논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신적 보상과 처벌에 의존하는 케팔로스의 주장과 폴리스의 공동 생활에 근거를 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규정적으로 부정하여 올바름에 관한 일정한 ‘의견’에 이르렀다. 트라시마코스는 이러한 견해 모두를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올바름을 정의하기 보다는 올바름을 폐기하려 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까지도 올바름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를 고수하고 있다. 트라시마코스는 전통적인 올바름의 정의가 전적으로 폐기되어 가는 아테나이의 상황을 표상한다.
대화방식에 대한 트라시마코스의 요구에 대응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을 대답해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트라시마코스는 이 대응에 조금은 수그러들면서 자신이 올바름에 관해 “앞의 모든 것과도 다른, 아닌 그것들보다 더 나은 대답을 제시한다면 어찌” 하겠는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하는 자로서 받아 마땅한 벌”, 즉 “지자(知者)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하지만 트라시마코스는 “가르침을 받는 것 이외에 벌금”(I like your notion of a penalty! he said; but you must pay the costs as well)도 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트라시마코스, 즉 소피스트(sophistēs)는 말하기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학생들에게 가르침의 비용을 받는다. 소크라테스는 돈이 없으니 “돈이 생기는 대로” 지불하겠다고 하나, 글라우콘은 “저희 모두가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위해 갹출”을 하겠다고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늘 하시는 식”이다.(“실인즉, 제게 돈이 있다면, 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의 돈을 제가 벌금으로 제의하죠… 그러나 실상 제겐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플라톤과 크리톤 그리고 크리토불로스와 아폴로도로스가 절더러 30므나를 벌금으로 제의하고서, 자신들이 보증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만큼을 벌금으로 제의합니다만, 이 금액에 대하여서는 이들이 믿을 만한 보증인들로 되어 드릴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38b) 소크라테스는 돈에 관해서도 그러하고 대화에 관해서도 그러하다: “스스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서는 반박하시는 식이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적극적인 주장을 개진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하고 트라시마코스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인기를 얻게 되었으면 해서, 자신이 말하고 싶어”(Thrasymachus was evidently longing to win credit)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주고받음은 일단락되고 올바름에 관한 트라시마코스의 의미규정이 제시된다. 소피스트를 움직이는 동기는 돈과 인기임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도덕성으로만 평가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을 놓고 광해군과 협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친정의 대표자 역할에 충실했고, 훗날 서인 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불쌍한 계모보다는 그의 정적이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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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은 왜 서얼을 구분 짓는 가족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왜 적처가 아닌 사람의 아들들을 차별했을까? 아마도 여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적처와 그 집안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조선이 유교 시스템의 도입으로 적처의 위치를 보장하자, 여자들은 누구나 적처가 되고 싶어 했고 적처가 된 후에는 그 지위를 배타적으로 누리고 싶어 했다… 조선에서 서얼에게 문과 응시를 제한하는 한, 적처의 지위는 점점 더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의 신분이나 혈통의 중요성도 지속되었다. 이처럼 조선에서 양반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또 적처라는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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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리학에 대해 생각하고 향후 성리학과 여성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성리학이 곧 지배적인 이념이 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여성들이 그것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내훈]]을 쓴 것이다… 흔히 인수대비를 보수적인 인물로 평가하는데 사실 인수대비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지식인 여성이었고, [[내훈]]은 그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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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가문이 하나의 기업과 같았다. 가문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조선이 망할 때쯤에는 국가는 없고 가문만 있을 정도였다.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이 초기에 사회 운영의 책임을 일정 부분 가족에게 맡긴 것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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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지음),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너머북스, 2011. (via gaudium) |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 (2009.2 - 2009.11)
호메로스, «일리아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단테, «신곡»
마키아벨리, «군주론»
데카르트, «방법서설»
로크, «통치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벤담, «파놉티콘»
폴라니, «거대한 전환»
공자, «논어»
** 텍스트: «인문 고전 강의», 라티오, 2010.
Thrasymachos와 Sokrates의 대화(2)
«국가», 336c-342e.
대화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고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관한 대화에 들어선다.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에 관한 자신의 규정을 제시한다: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ō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what I say is that ‘just’ or ‘right’ means nothing but what is to the interest of the stronger party) 소크라테스는 이 규정을 엄밀하게 다시 정의하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에는 “이득이 되는 것인 동시에 올바른 것”이라는, 가장 좋은 것에 관한 규준이 함축되어 있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더 강한 자’를 “법률(nomoi)을 제정”하는 자로 고치고, 그들이 “자기의 편익을 추구”(in every case the laws are made by the ruling party in its own interest)한다고 말한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올바름은 지배적 당파가 강요하는 법률에 붙은 이름’이 된다. 트라시마코스의 논지에 따르면 주권자가 제정하여 선포한 법률이 올바름의 원천이 된다. 이 법률은 공동선이 아닌 당파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다: “민주 정체(dēmokratia)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 정체(tyrannis)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서 처벌하죠.” 편익을 올바름의 근거로 삼는다면, 정체의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nomos가 아닌 physis로서의 올바름이 있다해도 그것은 정치적 nomos를 통해서 구현되어야 하며, 그 구현의 주체가 ‘모든 사람’이라해도 그것이 physis로서의 올바름인지를 식별해낼 수 없다. 어떤 이가 홀로 physis로서의 올바름을 최후까지 주장할 때, 그것이 physis라해도 그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의 규정은 physis가 아닌 nomos를 따르는 것이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서술한 것일 따름이다. 당위가 아닌 존재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규정에서 “올바른 것이… 편익이 되는 것이란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 뒤, “더 강한 자의 것”이라는 말은 검토를 하겠다고 한다. 어떤 정체나 편익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수긍하는 것이다. 그는 부분 긍정, 규정적 부정의 단계로 들어섰다. 그의 검토는 ‘더 강한 자’, 즉 법률을 제정하는 자의 “실수” 가능성, 즉 통치자의 기술에 집중된다. 트라시마코스는 통치자들도 “어떤 점에서는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이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통치자들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서는 이행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동시에 주장한다. 서로 어긋나는 이 주장들을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묶는다: “그렇게 되면, 통치자들한테 그리고 더 강한 자들한테 편익이 못되는 것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에도 선생이 동의하였다는 것을 또한 생각하시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 폴레마르코스가 동의하고,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의 추종자인 클레이토폰(Kleitophōn)은 “선생님께서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 말씀하신 것은 더 강한 자가 자기에게 편익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 옹호하지만, 이 둘의 논쟁은 여기서 그친다. 소크라테스가 “그건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고 하기도 했지만, 트라시마코스에게 어떤 뜻인지를 다시 물었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어떤 전문가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no one who practises a craft makes mistakes) 이로써 그는 ‘더 강한 자’를 ‘전문가’로 재규정하였다. 통치자는 능력과의 필연적 연관을 갖지 않아도 무방한,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앎을 가진 자로 바뀐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재규정에 쐐기를 박는다: “다시는 그와 같은 문제가 우리 사이에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통치자로 그리고 더 강한 자로 선생이 말하는 것이 다음의 둘 중에서 어느 쪽인지를 확정하시오. 흔히 말하는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엄밀한 뜻으로 말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더 강한 자인 그의 편익을 더 약한 자로서는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선생이 말한 그런 사람인지를 말씀이오.” 이에 트라시마코스는 “가장 엄밀한 뜻으로 통치자(ho archōn)인 자”(I mean a ruler in the strictest possible sense)라 대답한다. 이제 트라시마코스는 ‘더 강한 자’라는 ‘존재’, 즉 현실정치적 규준에서 ‘가장 엄밀한 뜻으로 통치자’라는 ‘당위’, 즉 이상주의적 규준으로 이행하였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차원에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편익을 긍정하고 더 강한 자만을 문제삼았던 소크라테스는 더 강한 자가 재규정되자, 앞서 논외로 하였던 편익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모든 기술은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 편익이 되는 것을 생각”(the interest of the subject on which it is exercised)한다는 것. 이것에 동의한다면 “그 어떤 전문적 지식(epistēmē)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게 된다. 여기에 이르자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이 난문에 빠졌음을 감지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겨우 동의”(he agreed reluctantly)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다진다: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ē)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what is good and proper for the subject for whom the practises his art)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 (2012.2 - 2012.11)
1강: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사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철학사를 읽는 이유
** 텍스트: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2007.
“그러니, 글라우콘! 호메로스의 찬양자들로서, 이 시인이 헬라스를 교육했으며 인간사의 경영 및 교육과 관련해서 그에게서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온 생애를 설계하여 살아가는 데 받들어 모실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네가 만나게 될 걸세. 자네는 이들을 이들 나름으로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로서 좋아하고 반겨야만 하며, 또한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우며 비극 시인들 중에서도 첫째 간다는 데 동의해야만 하네… 하지만,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詩歌)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 플라톤, «국가», 606e-607a.
희랍의 교사로서의 시인
이성추구자로서의 철인
«국가», 331d-336a.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함과 받은 것을 갚아주는 것, 이것이 올바름(正義)의 의미규정(horos)은 못 됩니다.” 케팔로스는 “여러분께 이 논의를 인계”한다고 하면서 제물을 보살피러 간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제물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는 제물로써 시종(始終)한다. “인계”를 말하기 전에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논의에 개입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견해를 옹호하면서 시인 “시모니데스의 주장”을 근거로 삼는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의 올바름 규정과 재산 모두를 상속함을 함축할 것이다. 그의 상속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폴레마르코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올바르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제가 보기엔 훌륭한 말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의미규정을 옹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한편으로 수긍하는(“하기야 시모니데스의 말이니 안 믿기도 쉽지가 않죠.”)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의 케팔로스에 대한 논박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나는 모르겠소”라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대한 자신의 의미규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 상대자의 규정만을 지속적으로 반박한다.[부정적 변증법]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반박을 듣고 아버지의 실패를 인정하여 의미규정을 수정한다: “단연코 그것은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는게 그 취지일테니까요.” 그는 이제부터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논증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인 시모니데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당신은 시모니데스가 이런 뜻으로 말한 걸로는 보지 않겠죠?” 폴레마르코스는 수긍한다: “물론입니다.” 논의의 국면은 전환되고 소크라테스는 둘 사이에 주고받던 의미규정을 새롭게 명제화한다: “그렇다면 시모니데스는 올바른 것(정의로운 것: to dikaion)이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서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 같소. 그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이것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이 합당한 것(to prosēkon)을 갚을 것(마땅한 것: to opheilomenon)이라고 일컬은 것 같으니까 말씀이오.”(It seems, then that Simonides was using words with a hidden meaning, as poets will. He really meant to define justice as rendering to everyone what is appropriate to him.) 케팔로스가 내놓았던 올바름의 의미규정은 타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올바른 것이었으니 일종의 ‘자기관계적 올바름’이었다면, 폴레마르코스가 내놓은 그것은 공동체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친구”와 “적”을 고려한 일종의 ‘타자관계적 올바름’이고, 이렇게 본다면 의미규정의 상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이라 하면서 논변의 핵심을 바꾸겠음을 알리고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함”이 시인답게 “암시적”인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조금은 보편적인 것으로 바꾼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의미규정을 세부적으로 다루어 나간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의 규정을 논파하여 그를 난문(難問, aporia)에 빠지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첫째 단계는 올바름과 기술(technē)의 관계를 묻는다: “누구에게 올바름을 주는 방책(technē)이 올바름으로 불리겠소?” 소크라테스는 의술과 키잡이(선장) 등의 기술을 거론한다. 이들이 어떤 기술을 사용하여 “친구들한테는 잘 되게 해 주되, 적들한테는 잘못 되게 해 주는 것이 올바름”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올바른 사람’이라 한다면, 그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에게야 의사가 쓸모 없소.” “그렇다면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올바른 이가 쓸모없겠죠?” 그들의 기술은 두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질병도 막는 데 있어서 능한 이면, 이 사람은 몰래 병을 생기게 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능하겠죠?” “그러나 군대의 훌륭한 수호자가 바로 적의 계략과 그 밖의 작전들을 몰래 탐지해내는 데 있어서도 또한 훌륭한 사람이겠죠?” “그러니까 올바른 이가 돈을 간수하는 데 있어서 능하다면, 그는 훔치는 데에도 능하오.” 기술을 가진 이를 올바른 이로 본다면, 그가 그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도 그의 올바름은 발휘된다. 소크라테스의 이 논변에 폴레마르코스는 수긍한다: “아무튼 우리의 논의가 보여 주는 대로입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일단 정리한다: “그렇다면, 올바른(정의로운) 이는 일종의 도둑으로 드러난 것 같거니와, 당신은 이를 호메로스한테서 배운 것 같소… 그러니까 당신에 의하면, 그리고 호메로스와 시모니데스에 의하면, 올바름이란 일종의 도둑질 기술이긴 하나, 그것은 친구들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기술인 것 같소.” 소크라테스는 또다른 시인인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이면서 시인들의 의미규정을 재정의한다. 폴레마르코스는 난문에 빠지면서도(“이젠 저로서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모르겠군요.”) 자신의 의미규정을 되풀이한다: “제가 생각하기엔 여전히 올바름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롭도록 해 주나 적들에 대해서는 해롭도록 해 주는 것인 것 갈습니다.” 폴레마르코스의 의미규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친구와 적의 구별이다. 이는 아테나이에서 널리 통용되는 ‘올바름’의 규준을 표상한다.
둘째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을 파고든다: “… 당신이 친구들이라 함은 각자에게 선량한 사람들로 생각(판단)되는 이들을 가리키는지요, 아니면 각자에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을지라도, 실제로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가요?” 이후 몇 번의 주고받음을 통해 폴레마르코스는 “선량하다고 생각(판단)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을 친구로 규정”한다. 이 규정과 올바름에 관한 앞서의 의미규정을 결합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실제로 좋은 친구는 잘 되게 해 주되 실제로 나쁜 적은 해롭도록 해 주는 것이 올바른 것”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건 해롭도록 해 주는 것이 올바른 사람이 할 짓”인지를 묻는다. ‘친구/적’, ‘잘 되게 해 주는 것/해롭도록 해 주는 것’의 구별을 폐기하고 “올바른 사람이 할 짓”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도출되는 귀결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올바르다고 누군가가 주장하면서, 이 말로써 올바른 사람들한테서 적들로서는 해를 입되, 친구들로서는 이로움을 입어야 된다는 걸 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이가 아닐 것이오. 그 사람은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누구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명백해졌으니 말씀이오.”(So it was not a wise saying that justice is giving everyman his due, if that means that harm is due from the just man to his enemies, as well as help to his friends. That is not true; because we have found that it is never right to harm anyone.) 이로써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가 마무리된다. 올바름은 수단이나 기술에 관한 앎이 아니라 필연적 본질적으로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친구와 적을 가르는 폴리스의 관습에 근거할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가지고 있던 올바름의 의미규정의 원천을 밝힌다: “이건 페리안드로스(Periandros)나 페르디카스(Perdikkas), 크세르크세르(Xerxes)라든가 테베의 이스메니아스(Ismēnias), 또는 부자로서 스스로 굉장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다른 어떤 사람(some despot, so rich and powerful that he thought he could do as he liked)의 것인 줄로 생각하오.” 이들은 코린토스의 참주, 마케도니아 왕, 페르시아 왕, 테베의 정치가들로 참주이거나, 돈을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곧바로 직면하고, 조건지워지고 넘겨받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세대가 스스로와 사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도록 애써서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거니와, 이러한 유서깊은 위장과…
«국가», 328b-331c.
폴레마르코스의 집에는 그의 아버지 케팔로스도 있었다. 케팔로스는 신에게 막 제물(祭物)을 바친 다음 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케팔로스는 “많이 늙으신 것같이 여겨졌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더 자주 이리로 오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은 대화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해짐에 따라, 그 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선생께서는 잘 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케팔로스에게 대화는 육신과 관련된 즐거움이 줄어들어야 즐기는 활동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이다. 그는 폴레마르코스 일행과의 다툼에서도 “설득”(327c)을 대안으로 내놓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연로한 이들과 대화하는 걸 기뻐한다고 말하면서 케팔로스에게 “노년의 문턱”[cf. «일리아스», 22.60; 24.487, «오뒷세이아», 15.246, 348]이 가져다주는 지혜를 듣고자 청한다. 먼저 케팔로스는 시인 소포클레스의 언급을 인용한다: “갖가지의 욕망이 뻗치기를 그만두고 숙어지는 그때에야 소포클레스께서 말씀하신 상태가 실현되는 것이니, 그건 하고 많은 광적인 주인들한테서 풀려나는 것이죠.” 소포클레스와 케팔로스에게는 ‘[육신의]에로스의 죽음’ 만이 일종의 평정상태를 가져다 주는 조건이다. 여기에 덧붙여 케팔로스는 자신이 노령을 수월하게 보내고 있는 핵심적인 까닭(aitia)이 “생활방식(tropos)”이라 주장한다. “쉬 만족할 경우에는, 노령일지라도 적당히 지칠 정도”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런 사람한테는 노령도 젊음도 다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케팔로스는 자신의 생활방식, 또는 영혼의 속성이나 성격이 “쉬 만족”하는 것임을 보이고 있다.
노령에 들어서면, 갖가지 욕망이 뻗치기를 그만 두고 숙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이들이 지혜롭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케팔로스의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반론을 시도한다. 그는 “많은 사람(hoi polloi)”의 의견임을 내세우면서 케팔로스가 가진 조건을 캐어 묻는다: “케팔로스 님… 많은 사람은… 어르신의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어르신께서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어 내시는 것은 생활방식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재산을 가지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부자들에게 위안거리가 많다고들 하니까 말입니다.”(… most people will not accept that account; they imagine that it is not character that makes your burden light, but your wealth. The rich, they say, have many consolations.) “생활방식”은 영혼의 속성이니 내면적인 것이지만, ‘많은 재산’은 외부의 물질적 조건이다. 소크라테스가 “많은 사람”을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핵심은 케팔로스가 노령을 잘 보내는 진정한 까닭(aitia)이 외부의 조건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케팔로스의 답변은 통속적 몰반성적 일반론이다: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고서는 노령을 썩 수월하게 견디어 내지 못하겠지만,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결코 쉬 자족하게는 되지 못할 것.”
소크라테스는 이 지점에서 대화를 일단락 짓고 재산에 관한 논의를 상세하게 진전시킨다. 그는 케팔로스에게 “소유하고 계신 재산 중의 대부분을 상속받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취득하신 것입니까”하고 묻는다. 이는 케팔로스가 재물에 대해 그리 애착을 갖지 않는 듯해서인데,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재물을 스스로 취득한 사람은 그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대화를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의 핵심은 재물에 대한 애착이 덜 해 보이는 케팔로스가 과연 자신의 삶의 편안함의 조건으로서의 부(富)를 자각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보려는 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재산을 중심에 놓고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어르신께서는 많은 재산을 가지심으로써 덕을 보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What do you take to be the greatest advantage you have got from being wealthy?) 케팔로스에게 떠오르는 것은 “저승(하데스)의 일들과 관련해 전해오는 여러 이야기(mythos)”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주는 이들은 시인이다. 이에 더해서 케팔로스는 세 가지를 내놓는다: 정직함(“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준다”), 경건함(“신께 제물을 빚지지” 않는다), 채무이행(“남한테 재물(財物)을 빚진 채로 저승으로 가 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는 재산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의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대답을 듣고 그것을 ‘올바름’의 문제로 전환시켜 버린다. 여기서 노령의 편안함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의 재산과 연결시키는 전환에 이은 두번째의 전환이 일어난다. 소크라테스는 이 두번째 전환에 일종의 ‘잘라내기’를 끼워넣고 있다: “아주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케팔로스 님! 하지만 바로 이것, 즉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正義): dikaiosynē)을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맡은)것을 갚는 것이라는 식으로 단순히(무조건적으로) 말할 것인지요…”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거론한 세 가지 중에서 ‘경건함’을 잘라내고 내용을 인간사(人間事)로 제한한다. 또한 그는 논의의 방향을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로 바꾼다.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들어섰을 때, 케팔로스는 신에게 막 제물을 바친 상태였다. 그에게 신은 올바름의 원천이며, 이것으로부터 인간의 의무가 이끌어져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잘라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첫째 핵심은 이것이고, 둘째는 케팔로스의 답변에 담긴 비일관성이다: “이런걸 행하는 것도 때로는 옳지만, 때로는 옳지 못하다고 말할 것인지요?” 정의(定義)는 그 안에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는데 케팔로스가 내놓은 원칙은 상황에 따라서는 지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경우(“멀쩡했을 때의 친구한테서 무기를 받았다가(맡았다가), 후에 그 친구가 미친 상태로 와서 그것을 돌려주기를 요구한다면”)도 있음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것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논박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느끼는’ 무언가다. 달리 말해, 양심은 행동적이지도 인지적이지도 않다. 양심이 주로 존재하는 곳은 ‘감정(emotion)’으로 더욱 잘 알려진 ‘정서(affect)’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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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은 또 다른 생명체 — 반드시 사람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 나 인간집단,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류 전체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을 궁극의 토대로 삼는 의무감이다. 양심은 누군가나 무언가에 대한 감정적인 유대감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다채로운 감정들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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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정확히 100명의 성인들로 구성되며 기존의 집단통계에 딱 들어맞는 사회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가상 사회의 100명 가운데 4명은 소시오패스 — 양심이 없는 사람 — 다. 양심을 지닌 나머지 96명의 시민들 가운데 62.5%는 별다른 의문 없이 권위 — 필시 그 집단에서 보다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소시오패스들 가운데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 에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36명만이 양심과 더불어 자기 행동의 책임을 짊어질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물론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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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책을 모르는 자들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양심에 얽매인 사람이 진실을 추궁하려고 할 때 특히 더 그럴듯하다. 궁지에 몰린 소시오패스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할 만큼 애처롭게 눈물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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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선한 사람들의 보다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옳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선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사적으로 자문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을 토대로 삼는 의무감에 비추어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을 엄밀히 검토한다. 양심의 자문은 좀처럼 우리 마음에 절대적인 획신을 허용하지 않으며, 설령 허용하는 경우라도 우리는 그 확신을 위험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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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한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행동은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동정심에 호소한다… 선한 사람들의 동정은 두려움보다도 더 편리한 백지위임장이다. 동정을 베풀 때면 우리는 잠시나마 무방비 상태가 되고, 우리를 집단으로 결속시키는 본디 긍정적인 다른 많은 인간특성들 — 성적 유대, 사회적이고 전문적인 역할과 창의적인 사람들에 대한 존중,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 — 처럼, 이러한 감정적인 취약성 역시 양심없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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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거물급 소시오패스들의 삶은 거의 불행하게 막을 내리며, 이런 현상은 보다 지역적인 소시오패스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소시오패스는 그 규모와 상관없이 무조건 지는 게임으로 보인다… 꽤 일반적인 듯 보이는 믿음과 달리, 무자비한 행동은 결국 삶의 좋은 것들을 정당한 몫 이상으로 가져다주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의심스러운 사람이 진짜 소시오패스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과연 그가 몰락했는지 — 부분적으로든 완전히든 — 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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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스타우트(지음), 김윤창(옮김),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산눈, 2008. Martha Stout, The Sociopath Next Door(2006) |